판소리 명창 이동백(李東伯, 1867∼1949년)

구한말 판소리 명창 이동백(李東伯)은 조선5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본명은 이종기(李鍾琦), 아명은 이동백(李東伯)이며,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18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7년3월호<조광>에 실린 이동백의 회고담에 의하면 태어나기 전년도에 부친이 별세하게 되 어 삼촌댁에 기거하고 농사짓고 살았다 한다.
어린 시절 한 때 우리고장 한산에서도 잠깐 살 았다. 8∼13세에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나, 판소리에 매력을 느껴 우리고장 장항읍 성주동 (빗그뫼)에 살고 있던 판소리 명창 김정근(金正根1839∼1895년)에게 김정근의 아들 김창룡(金 昌龍1870∼1943년)과 함께 배웠다.1937년4월2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동백의 기록을 보면, 작은아버지는 이동백이 공부는 하지 않고 판소리에 전념하니 판소리 공부를 전면 금지시켰다.
이동백은 3년쯤 몰래 판소리공부를 하다 결국에는 판소리공부를 중단하였으나 판소리공부를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어 결국에는 조선에 제일가는 명창이 되고자 결심하고 판소리공부에 전 력을 다하여 전국에 유명한 명창이 되었다. 무형문화재 제9호 은산별신굿 기능보유자였던 이 어인년(李於仁蓮1894∼1986년)이 6촌 여동생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집안은 무속계(巫俗系)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근은 중고제의 창시자로 아들 김창룡과 이동백으로 하여금 중고제 명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동백은 순창 출신의 명창 김세종의 문하에서 다시 판소리를 배웠고, 또한 이날치에게 도 배웠다. 경상남도 진주로 내려가 창원 마산 등지를 주요 활동무대로 삼고 9년간 활동했다. 서울로 와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원각사 시절에는 감창환, 송만갑 등과 함께 창극운동에 참여했으며, 원각사 폐쇄 이후에 송만갑의 협률사에 참여하여 전국을 순회하던 중 한일합병이 되어 고향 종천면 도만리로 낙향 하였다. 1939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그 후 가끔 무대에 섰으며 경기도 평택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동백은 고운 음색과 다른 사람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심청가>,<적벽가>를 잘했고, 특히 <새타령>은 이날치 이후 최고라는 평을 받았다. <심청가>.<적벽가>.<춘향가> 등의 음반을 남겼다. 제자로는 강장원을 두었으나, 강장원이 별 다른 제자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전승되지 못했다. 

이동백의 일생

1. 이동백은 1866년 충남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다. 동백은 청상과부 편모슬하에서 자라다가 갈수록 살림이 어려워져 큰아버지에게 맡겨지는데, 어린 이동백은 큰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알고 자란다.

2. 이동백이 열두 살 되던 해부터 소리를 배우려 하자, 그의 백부는 소리를 못하게 야단을 치고 어떤 때는 모진 매도 때리기도 한다.그런 중에도 동백은 어른들의 눈을 속여 가며 틈틈이 노래를 배우기를 2, 3년간 계속한다. 집에서 소리를 하려니 백부가 엄하게 말리고 또 가인들도 이상스럽게 여기므로 동백은 혼자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사람 없는 데를 골라 소리를 닦는다. 그리하여 도만리 희리산 용구에서 2년간 독공한다. 

3. 소리 배우고자 하는 이동백의 마음이 변치 않자 백부는 가정을 이루면 마음을 잡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동백을 열세 살에 혼인시킨다.그러나 백부의 뜻에 따라 장가를 들고 나서도 소리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식지 않아 권솔을 데리고 따로 나와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4. 이동백이 백부의 집에서 따로 나와서는 정말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초암 사는 이규석이란 율객을 찾아가서 먼저 갖가지 소리 사연을 배워 가지고 공부하기를 시작한다.그러다가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가 잠시 조승지의 청지기 노릇을 한다. 얼마 후 집안 형편도 나아지게 되고 나이가 차차 들자, 노래 공부를 완성하여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창이 되어 보려고 표연히 고향을 떠난다.

5. 이동백은 스무 살 전후에 영남 각지로 돌아다니며 노래 잘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수련을 쌓는중 가곡을 정말 깨끗이 하는 김정근이라는 선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배움을 청한 끝에 김정근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하게 된다.
이후 강원도 감사로 있던 김정근의 배려로 이동백이 광대의 신분에서 기적적으로 충주 감영 총수라는 감투를 얻을 기회를 잡는다.

6. 동백이 소리에 미쳐 전국을 돌아다닐 즈음, 그의 어머니는 서천에서 살다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아들을 찾아 진주 근처 창원에 와 살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는다. 효성이 지극했던 이동백은 어렵게 얻은 벼슬을 포기하고 모친이 있던 창원으로 내려간다. 
이동백은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뒤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못 이겨 1891년 무렵부터 공연 활동을 했다. 처음에 경기도로 상경했다가 진주, 창원 등 주로 경상도 지역을 주요 무대로 삼아 약 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다.

7. 그렇게 한참 팔도를 돌아다니다가 서른일곱 살 경인 1902년 서울로 올라와서 영성문안에 집을 잡고 산다. 이후 원각사에서 소리하며 서울 무대를 장악하고, 김창환, 송만갑 등과 창극 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다가 선배 명창 김창환의 주선으로 고종(高宗)의 부름을 받고 어전에 나가 여러 차례 소리를 한 뒤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고종의 총애는 대단하여 이동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원각사의 소리 공연에 전화선을 대고 그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이동백은 고종에게서 당상관인 문관으로 정 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 받고, 그 뒤부터는 경복궁과 덕수궁으로 항상 드나들면서 궁궐 안 장악원에 인연을 맺어 옥관자 달고 관복출사한다.

8. 이동백은 1915년 경성구파배우조합 창립 구성원이었고 서울의 연흥사, 장안사 두 극장과 전속계약을 맺고 창극조 공연 활동을 했다.
1918년에는 송만갑과 협력하여 협률사를 조직하여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으며 1930년대에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915년부터 1936년에 미국 빅타, 일축, 일본 콜럼비아, 일본 빅타, 일본 폴리도르, 쇼지쿠 음반회사에서 많은 녹음을 남겼다.

9. 1939년 3월 15일 경성 부민관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 및 동포들이 있는 이웃 나라들까지 가서 은퇴 기념 작별 공연을 하였다.
은퇴 후 이동백의 명성이 잦아들지 않자, 어느 날 시내 어떤 고등학교 학생 셋이 찾아와서 조선 고성악의 부흥에 힘을 쓸 터이니 성악을 가르쳐 달라고 열심히 청한다. 이동백은 광무대(光武臺)에 있는 백점봉(白点鳳)에게 소개하여 그 학생 셋은 약 2년 동안이나 열심히 백씨에게 사사하며 노래를 배운다.
1940년대 박록주 등의 후배 소리꾼들의 간청으로 소리 활동을 재개하여 이따금 공연을 하였고 강장원을 비롯해서 정응민, 정광수, 정남희, 김석구, 백점봉, 김토산, 이화중선, 김차돈, 임유앵, 조영학, 공기남, 박복남, 김득수, 신쾌동, 염금달 등에게 소리를 가르친다.

11. 이동백은 은퇴 후에도 식지 않는 소리에 대한 열정을 품고 후배 양성에 힘쓰다가 1949년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칠원리에서 작고한다.

판소리 명창 “김창룡과 이동백”

김창룡(金昌龍1870∼1943년)
이동백(李東伯1867∼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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